성경이야기

성경이야기

이전 목록 다음

율법과 복음의 관계

관리자 16-03-31 09:36 ( 조회 5,465 )
율법과 복음의 관계

변 종 길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신약학

여러 견해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고대 교회의 말시온은 율법과 복음을 날카롭게 대립적으로 이해하여 구약 성경을 비롯하여 율법적인 것은 성경에서 다 삭제하고 말았다. 종교개혁시대에 루터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며 절망하게 만들며,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며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폐지되었으며, 신약 시대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법 곧 사랑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에 의하면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율법의 계명들을 지킬 필요도 없으며, 단지 사랑의 원리를 따라 행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율법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구약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신앙의 진수로 파악하고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안식일 계명을 구약에 기록된 그대로 지키기 위해 주일에는 밥도 짓지 아니하고 차도 타지 아니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런 것을 통해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율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과거의 엄격한 전통과 현재의 여러 혼란한 풍조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 5:17).
따라서 우리는 율법과 예수님의 관계가 ‘폐함’의 관계가 아니라 ‘완전케 함’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도 ‘대립’이나 ‘폐지’의 관계가 아니라 ‘완성’의 관계임을 말해 준다.

완성의 의미
그러면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고 할 때 이것은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두고서 거기다 무엇을 덧붙여서 완성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보충’의 의미밖에 안 될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기록된 내용들을 그저 수동적으로 이루셨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기계처럼 지시되어 있는 대로 ‘실행’하는 것밖에 안 된다. 마치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이미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을 실행하듯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의 주체가 되셔서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율법을 이루셨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이 ‘몸’이시기 때문이다(골 2:17).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율법의 의미가 충만히 드러나고 그 온전한 내용이 채워진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떻게 이루셨을까?

율법의 성취
예수님은 먼저 율법에서 자신에 대해 기록된 것들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애굽으로 피난 가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등이 다 “주께서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다(마 1:22, 2:15, 4:14, 8:17, 12:17-21, 13:35, 21:4 등).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에 자기에 대해 기록된 대로 다 이루셨다. 또한 예수님은 율법의 계명들을 다 지켜 행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들을 다 이루셨다. 즉,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 드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정죄를 당하셨다. 그 이유는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롬 8:3). 곧 우리 인간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지 못하고 늘 정죄 아래 있으며 고통과 자주 가운데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율법의 정죄를 대신 당하게 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대신 이루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9:30).
이것은 곧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여기서 율법의 ‘마침’(telos)이란 율법의 폐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처럼 자기 의를 세우려고 율법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모든 노력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뜻이다.

율법의 원래 의미 회복
나아가서 예수님은 율법의 원래 의미를 충만히 드러내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정죄하며 저주하는 기능으로서의 율법의 역할은 끝이 났지만, 이로써 율법의 모든 기능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도 율법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표준이 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운다’고 말하였다(롬 3:31).
우리가 믿은 후에도 계속 남아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활의 표준이 되는 율법’을 말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율법의 제 3 효용’이라고 부르는데, 개혁교회에서 강조하는 기능이다. 율법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토라’로서 그것은 원래 ‘가르침, 교훈’을 뜻하였다. 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율법은 원래 우리의 생활의 안내자가 되고 길잡이가 되기 위해 주어진 선한 것이었다(롬 7:12). 문제는 우리가 죄에 빠져 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리어 율법의 정죄를 받아 저주와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된 우리에게는 율법이 다시금 원래의 선한 기능을 회복한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의 생활을 인도하며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감사의 규칙’이라고 불렀다. 곧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노예처럼 두려워하며 굴종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루터파 교회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당수가 정죄하는 율법의 기능, 곧 몽학선생적 기능(율법의 제 2 효용)만 강조하고 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율법의 기능은 등한시함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생활이 소홀히 되고 윤리가 약해지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율법에 대한 치우친 이해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된 율법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모든 계명들이 문자 그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은 유대교나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사실상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되고 만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다(갈 4:10,11). 나아가서 이러한 유대주의적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갈 2:21).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모든 계명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안식일 계명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신앙의 표현으로 안식일(주일)을 보내어야 한다. 두려움과 금지의 소극적인 안식일 개념에서 기쁨과 선행의 적극적인 안식일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신약적 안식일 개념에는 일상적인 상거래나 자기를 위한 시간 사용이나 세상 쾌락은 당연히 배제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는 신약적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최소한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구약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구약 시대의 수준을 능가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율법을 능가하며 율법을 참으로 율법 되게 한다. 전에는 억지로, 두려움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율법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전에는 단지 율법의 ‘문자’에만 얽매여 외적 순종만으로 만족하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율법의 ‘원래 의미’를 생각하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전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그저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가졌지만, 이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마음의 살인임을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마 5:21-26).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도 단지 외적 간음뿐만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까지도 죄가 됨을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성결을 위해 노력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이해하는 것이며, ‘복음의 빛 아래서’ 율법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
이러한 것은 곧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의 관점에서 율법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40). 이는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곧 우리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은 곧 이웃에게 사랑을 행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사랑’은 각각의 계명들 전체를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며, ‘각 계명들’은 그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율법과 사랑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을 다른 관점에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가 율법을 대할 때에 그 핵심과 근본 정신은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의 구체적 실천은 율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율법의 각 계명들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제사 드리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신정국가와 관계된 시민법들은 이제 더 이상 시행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도덕법도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엡 6:1).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본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을 야고보는 ‘최고한 법’이라고 불렀으며(약 2:8),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갈 6:2).
이전 목록 다음

댓글기능은 로그인 이 필요합니다.